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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가 짧은 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청년 정치인이 연애관·결혼관을 말하는 내용이다. 정치관이 맞지 않는 상대와 연애나 결혼은 힘들다는 게 결론이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며 가치관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영상에는 자극적인 댓글이 많았다. 이를테면“좌빨하고는 절대적으로 말이 안통함”, “상식적으로 지능 낮은 배우자를 어떻게 만나요”, “경제관념 제대로 박혀 있는 인간이면 좌파 절대 못함” 같은 말이다. 수위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비난이 잇따랐다.
그 영상을 올린 게 국민의힘 전 부대변인이므로 댓글을 쓴 사람들도 강경 보수층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비난의 방향이 우에서 좌로 흐르는 경향을 띤다. 비슷하게 수준의 비난을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보아왔다. “20대에게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 “일베는 탱크로 밀어야 한다” 김어준과 최욱을 경유해 쏟아져 나온 말이다. 박근혜와 김건희를 향했던 성희롱은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다. 박원순, 안희정 지지자들이 그 피해자에게 쏟아낸 말은 양해될 수 없는 폭력이다.
정치 성향에 따라 방향이 다를 뿐 비난의 양상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노골적으로 쓰면,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와 “틀딱 선거권 뺏어야 한다”는 류의 말의 배설이 한데 뒤섞여 공론장의 벽에 똥칠을 하고 있다.
자유의 가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민주를 제목으로 달고 있는 세력들이 그렇게 ‘토론’하고 있다. 이견을 성숙하게 다루는 대신 상대를 제압하는 노골적 표현과 논리만 서로 벼르고 있다.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사랑할 수 있을까?
질문에 교묘한 함정이 있다.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말이 어떤 심상을 불러오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많은 경우 이 심상은 ‘피로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정치 성향은 비난과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다. 누구를 적대하는지가 정치 성향의 기준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양쪽 다 동의하지 않겠지만 3자의 시선에선 뉴스공장 구독자와 펜앤드마이크 구독자 사이의 차이는 종이 한 장보다 얇다. 상대를 어떻게 공격할지, 누구를 방어할지를 중심으로 정치를 소비하는 방식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방향만 다를 뿐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혐오를 강화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정치 성향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위의 댓글을 쓴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어서다. 모든 말과 행동에서 증오와 불신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 불편감이 정치 성향이 달라서일까? 아니다. 증오와 불신을 정치 성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사람을 미워하는 일을 정치의 차이라고 착각한다.
나는 정치 성향이란 말을 다르게 본다. 그것은 삶을 관통하는 경험들이 내면에서 소화되어진 결과다. 세상을 보는 관점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말은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이 말 안에 ‘꺼려진다’는 판단은 포함되지 않는다. 증오와 불신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처음 영상을 보내준 친구는 우파다.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 가난하게 컸고 성공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장 자유와 공정한 경쟁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 다른 친구는 윤석열이 교회 청년들에게 보낸 편지에 감동을 받아 여전히 지지한다고 했다.
가난과 종교가 두 친구의 삶에서 중요한 각각의 키워드였다. 그 경험이 정치 성향의 뿌리가 되었다. 언제부터 누구를 적대해 왔는지가 아니라,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신념을 이루었다. 정치와 관련된 뉴스를 볼때, 어떤 정보를 수용할 지도 이 틀이 결정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정치 성향 그 자체보다, 그런 성향을 가지게 된 이유가 중요하다는 거다.
경험상 그 이유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신념이 내면에서 소화되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정견을 더 크고 강하게 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성과 공감보단 증오와 불신에서 근거를 찾았다. 마치 광신도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전도하려 들었다. 상대를 제압하려 하고, 공격적이거나 배타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런 광신과 증오에 주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증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양해될 수 있는 정치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공동체를 해치는 질병으로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
나는 좌파다. 무슨 좌파씩이나 되는지 항상 생각하지만 편의상 그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좌파는 세상 탓을 많이 한다. 좌파의 얘기를 듣다보면 세상 탓이 아닌 게 없다. 그리고 난 정말 그렇다고 믿는다. ‘생각한다’ 대신 ‘믿는다’는 말을 썼다.
우파 친구처럼 나도 가난하게 자랐다. 뿐만아니라 불행하게 자랐다. 특히 가족의 고통이 아주 컸다. 내 가족은 폭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극단적인 사건사고가 계속됐다. 최선을 다했지만 고통을 이겨내기엔 속수무책이었다.
우파의 논리로는 나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었다. 노력을 안해서,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서, 자기 삶에 책임감이 없어서 불행하다는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세상 탓을 많이 했다. 불평등이 불행의 이유라고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마침내 믿게 되었다.
“원래 좌파를 싫어하지만, 너 같은 좌파는 이해가 되네. 왜 좌파인지 알 것 같애” 우파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동지’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공감을 ‘반대편’ 사람에게 받았다. 서로의 눈을 가리고 있던 증오와 불신을 걷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던 어느 학자의 주장을 떠올린다. 우리는 내가 아니고 우리이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우리에게 주적이 있다면 그 공감을 가로막는 이들이다. 나쁜 논리를 만들고 있는 자들이다. 증오와 불신을 뿌려대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만이 장벽을 허문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낭만적인 주장이 아니라 매우 합리적인 결론이다. 명예나 이름은 남김 없더라도 사랑은 남아야 한다. 증오와 불신을 넘어 함께 사는 방법으로.
이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