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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야기] 그 많던 조선의 무슬림들은 다 어디로 갔나

처용무는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다.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삼국유사에 처용이 아랍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처용무는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다.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삼국유사에 처용이 아랍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세종대왕은 즉위년인 1418년 9월 종묘에 배알하고 창덕궁 인정전으로 옮겨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하례를 받았다. 이날 실록에 따르면 악공의 풍악과 함께 관리들이 품계별로 돌아가며 4배를 올리는 하례식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놀랍게도 '회회(回回)송축' 의식이다. 무슬림들이 이슬람 경전인 코란 낭송이나 이슬람식 기도를 통해 국가의 안녕이나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것이 바로 '회회송축'이다. 실록은 '회회인'들이 인정전 뜰에 들어와 송축을 읽고 이 절차가 마무리되면 판통례(의식을 진행하는 관리)가 "예를 마쳤다"고 외친 후 임금이 좌에서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랍인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알려진 신라 원성왕릉 무인석. 왕릉의 무인석에 등장할 만큼 아랍과 교류가 활발했다.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아랍인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알려진 신라 원성왕릉 무인석. 왕릉의 무인석에 등장할 만큼 아랍과 교류가 활발했다.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조선시대 왕의 즉위식이나 정월 초하루, 동지, 망궐례 등 궁중의 하례에 문무백관과 외교 사절들을 초빙했다. 그 자리에 이슬람 지도자들도 정례적으로 초대받아 송축을 했는데 이를 '회회조회'라 불렀다. 세종대왕은 이슬람 원로의 낭랑한 코란 낭송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놀랍게도 조선 초만 해도 무슬림들은 회회인으로 불리며 조선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았다. 무슬림끼리만 모여 사는 집단 생활을 했으며 고유한 복장과 종교의식도 지켜나갔다. 태종 7년(1407) 1월 17일 실록은 "회회 사문(이슬람교 승려) 도로가 처자를 데리고 와서 조선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집을 주어 정착하도록 했다"고 썼다.

눈이 크고 코가 오똑했다는 처용에 대한 삼국유사 기록으로 볼 때 처용이 아랍인이었을 가능성을 최근 일각에서 제기할 만큼 아랍과 교류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846년 아랍 지리학자 이븐 후르다드베가 저술한 '왕국과 도로총람'이라는 책은 신라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책은 "중국의 건너편 콴수를 가로지르는 곳에 산이 많고 금이 풍부한 신라로 불리는 나라가 있었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혹되어 영구히 그곳에 정착하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썼다. 이를 포함해 9~15세기 사이에 이슬람 학자 17명이 쓴 책에서 아랍인들과 신라인 간 빈번한 접촉을 다루고 있다. 마수디는 이라크인이 한반도에 진출한 사실을 전했고 디마시키, 알 누와이리, 알 마크리지는 시리아 알라위족들이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왕조(661~750년)의 박해를 피해 한반도로 망명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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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중엽 아부 자이드, 슐레이만 알 타지르 등의 아랍인 여행자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876년 '황소의 난' 기간 중 중국 동남부 해안지대에서만 1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살상됐다. 당시 이 지역에 교역에 종사하던 아랍인들의 자치공동체가 다수 설치된 것으로 미뤄 피해자 대부분은 아랍인으로 추정된다. 아랍인들은 생존을 위해 중국화하거나 주변 국가로 흩어졌으며 이 중 일부가 신라로 흘러들어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성에 대규모 이슬람 집단이 거주하면서 그들만의 종교의례를 위해 이슬람 모스크를 짓고 살았다. 이슬람계 주민이 고려에 건너와서 정착해 살았던 것은 원나라 간섭기부터로 짐작된다. 중앙아시아 위구르·터키계 무슬림들은 몽골의 고려 침공 때 몽골군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유입돼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얻거나 몽골 공주의 후원을 배경으로 권세를 누렸으며 고려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점차 동화 과정을 거쳤다.

고려에 정착한 이슬람 집단은 경제력은 물론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구축했다. 또 자신들의 고유한 습속과 언어, 종교 등을 보존하면서 개성과 인근 도시에 자치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들은 고려가 망한 후 조선 초기까지도 종교적 자치권과 이슬람식 양식을 지켜나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슬람 문화는 우리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쓰는 음력은 이슬람 역법을 우리 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뛰어난 농사 달력이 있어야 했지만 중국의 수시력은 해 뜨는 시각, 달의 움직임이 우리와 잘 맞지 않는다고 세종실록은 지적하고 있다. 집현전 학사인 정인지 등이 이슬람 역법의 원리와 이슬람 과학을 배워 우리 역법의 일몰 시간, 동지 같은 것을 모두 대입해 만든 것이 오늘날 음력의 기초가 된 '칠정산외편'이다. 조선시대 크게 유행한 청화백자도 이슬람 영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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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반도에서 왕성하게 살아가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역사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이유가 세종실록에 잘 기술돼 있다. 예조가 아뢰었다. "회의 무리가 의관이 달라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는 바 이미 우리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우리 의관에 따라 차이를 없애야만 자연스럽게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회회인들이 대조회 때 송축하는 의식도 폐지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윤허했다. 1427년 무슬림 특유의 종교의식과 복장을 칙령으로 금지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무슬림은 그들의 고유 풍습을 버리고 조선에 빠르게 동화돼갔던 것이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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