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디안 시대는 1차대전 이후 회고 속에서 소위 황금빛 오후 - 잔디밭 위에서의 크로켓과 피크닉, 화사한 드레스와 정장, 햇살 가득한 시골의 별장, 정원에서의 파티 - 라는 수사 하에 낭만적으로 기억된다.
제국은 불안불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 같았으며, 식민지나 러시아 같은 산업화 후발 주자들의 채권들은 항구적인 부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고 후대에는 기억되었다.
그리고 그 전성기를 구가하는 제국의 표상으로서 에드워드 7세가 존재했다.
에드워드 7세는 지적으로는 얄팍했으며 여성편력이 화려한 바람둥이였지만, 그럼에도 장점이 더욱 앞서는 사내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제국은 비록 뒷골목에서 잭 더 리퍼가 거닐지라도 겉으로는 금욕성을 표방했다. 국서 앨버트가 살아있을적의 왕실은 금욕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연출하여, 국서 앨버트가 죽은 후 여왕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영원한 과부로서 궁정을 음침하고 서늘하게 운용했다. 요컨대, 빅토리아 시대는 왕실이 조장한 음울한 도덕주의의 시대였다. 이면이 존재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이 새 뚱보 왕은 어떤가. 여왕의 죽음 후, '신사 여러분, 끽연합시다!' 라고 선언했듯, 그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동차를 탈 때는 마을을 거칠 때 마다 자신들에게 환호하는 신민들에게 모자를 들어보이던 사내요, 귀족들과 모여앉아서 카드를 치고,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인들과도 소통할 줄 알던 쾌활하고 열려있는 왕이기도 했다. 더해, 본인의 사교성과 혼맥망을 십분 활용하여 복잡미묘하게 꼬여있던 유럽 외교망을 왕실 외교로 돌파하여 평화를 유지하고자 애썼다.
몇차례의 추문을 제하면 그는 대중들에게는 사랑받는 왕이자 신뢰받는 피스메이커였다.
... 그러나 1900년대 후반에 오면,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이미 예순을 넘었다. 유전자도 썩 좋은걸 물려받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앨버트 공은 아마도 크론병과 우울증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사람이며, 혈우병 여왕 빅토리아는 혈우병 외에도 많은 병을 물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본인의 생활 습관도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를테면 먹는 것. 오늘날의 고급 식당가에서는 누벨 퀴진. 이 돈을 내는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가볍고 심플한 음식을 내오지만, 이 시대는 오트 퀴진의 시대.
하나만 봐도 속이 더부룩 해지는 고기 중심, 버터와 크림을 보이는 대로 때려 넣는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 무겁디 무거운 식사의 시대였다.
적당히 덜어먹거나 적당히 남겨먹으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에드워드 7세는 대단한 대식가에 탐식가였다. 그의 삼시세끼에 대해 간단히 나열해보면,
아침 : 버섯을 곁들인 닭 요리, 엉덩이살 스테이크와 감자, 구운 소시지, 그리고 트러플을 넣은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저녁은 특히나 호화로웠는데, 보통 9시쯤에 12코스로 차려진 만찬을 먹었다. 전해지기로, 수십 개의 굴을 '몇 분 만에 거뜬히 삼켰'으며 이로 배가 차기는 커녕 오히려 식욕이 더 돌아 트러플을 채운 꿩고기, 젤리에 절인 닭고기, 샤블리 와인에 데친 가자미, 뼈를 발라내고 푸아그라를 듬뿍 넣은 도요새 요리를 먹어치웠으며, 소스는 진하고 크리미 할 수록 곧 버터와 크림, 육수가 잔뜩 들어갈 수록 좋아했다.
일반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루를 먹으며 보낸다면 불쾌할 정도의 배부른 감각에 낑낑대며 잠자리에 들겠지만 에드워드 7세는 그렇게 먹어대고도 부족했는지 자는 중 배가 고플까봐 로스트 치킨 한 마리를 들고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 일어날 때는 보통 닭 뼈만 남은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요컨대 이런 상황이랄까. 별명이 Tum Tum, 볼록한 배였을 정도다. 국왕 본인은 이 별명에 대해 매우 불쾌해했으며, 자신을 Tum Tum이라고 부른 친구를 쫓아낼 정도로 민감하게 굴었기에 대놓고 그를 그렇게 부르지는 못했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렇게 불렀다.
젊었을 적에는 그래도 온천지대로 가서 요양하며 가스 따위가 가득 든 광천수를 마시고 설사하며 감량하는 다소 해괴한 다이어트 법을 할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그것도 무리.
여기에 사교생활을 한다고 잠도 늦게 들고, 담배도 시가를 하루에 열몇대씩 뻑뻑 피워댄다. 덕분에 만성 기관지염과 폐렴에 시달렸다.
거기에 또 배에 염증도 많아 대관식 직전엔 배를 째고 고름을 500~600ml 정도 짜낸 적도 있었더랬다.
이 모든 것이 모이고 모여 1909년 쯤이면 에드워드 7세는 계단을 올라가지 못할 정도라 순행 중 2층 객실을 쓰느니 그냥 하수도 냄새에 투덜대며 1층 객실을 쓰고, 심심하면 발작적으로 숨 넘어갈 듯 기침해대며, 가끔은 제 살에 파묻혀 죽을 듯 헐떡대던 뚱보 노인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보면 환호했지만, 그는 그 환호에 응답하는 것도 힘겨워하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 상태처럼, 유럽과 영제국 역시 좋지 못했다.
국왕은 평화를 위해 재위 기간 내내 왕실 외교를 하며 힘썼지만, 세상은 조금도 더 안전해지지 않았다.
독일을 포위하는 전략은 빌헬름을 더욱 피해망상에 빠뜨릴 뿐이었다. 동유럽은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에렌탈의 후안무치한 불장난으로 일이 커진 보스니아 위기는 국왕이 세상에서 가장 점잖은 신사인 줄 알았던 프란츠 요제프조차 믿을 수 없음을 증명해 버렸다.
영국의 대응은 러시아와 더 밀착하는 것이었으나, 국왕은 나약한 러시아의 처조카가 정신나간 독일의 조카 만큼이나 믿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국왕은 '위대한 고립'을 표방하던 여왕의 시대를 끝내고 영국을 대륙으로 이끌었으되, 대륙에서 영국이 찾은 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으로 발 맞추어 나아가는 자기 자신이었다. 에드워드 7세는 자신에게 붙은 피스메이커 칭호가 텅 빈 것임을 직감했으며, 곧 국왕의 주변인들은 본래 쾌활하고 활기 넘쳤던 국왕이 점차 우울해하며 침묵 속에 고뇌하는 모습이 잦아졌음을 눈치챘다.
제국 안에 대해서라면, 대대적인 노동운동의 기미가 엿보이고 있었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의 무슨 일이 날 것 같은 파업, 폭동, 노사분규의 연속을 예고하는 불길이 피어올랐다.
또한 아일랜드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1910년 영국 서민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정권 유지를 위해 손 벌릴 대상을 찾아야 했다.
지난 반세기간 아일랜드의 정치를 지배해온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은 자유당이 손 잡기 딱 좋은 상대였다.
허나 그들은 더블린에 아일랜드 전역을 총괄하는 자치 정부를 수립하는 Home Rule의 세번째 시도를 곧 개시할 예정이었으며, 가톨릭 다수 지배 자치 정부를 두려워한 얼스터 개신교도들, 그리고 그들의 얼스터 연합주의에 호응하는 영국 보수 엘리트들은 Home Rule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를 쓸 것이었는데, 그 모든 수 중 가장 강력한 것 - 귀족원 거부권을 무너트리기 위해, 아일랜드 의회당은 후술할 정치적 폭탄에 손을 얹었다.
아, 그리고 이들에 비하면 작은 소동이지만, 여성 참정권 운동 역시 제국을 흔들고 있다.
여기까지의 일들. 노동 운동, 아일랜드 위기, 서프라제트는 오래된 명저 The Strange Death of Liberal England에서 자유당의 필연적 몰락을 자아낸 세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래도 이들은 에드워드 7세의 말년에는 어디까지나 피어오르는 중이거나 소소한 정도에 불과했으나, 진짜 문제가 있었다.
에드워디안 헌정 위기.
영국 귀족원은 강력한 거부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권력을 투쟁적이고 잔인하게 써야한다고 믿은 솔즈베리 경 시절 잘 보여졌듯이 자유당의 각종 개혁 법안들을 상당수 격추했으나, 그래도 예산에 관련된 것들은 서민원의 권리로 존중하여 건드리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 불문율은 여태까지는 잘 지켜지는 것 같았으나, 자유당 내각의 로이드 조지가 해군 예산과 사회 지출의 증가를 위해 토지 소유주들과 고소득층에 무겁게 과세하는 인민 예산People's Budget을 들고 나오자 흔들리기 시작한다. 귀족원이 바로 그 토지 소유주들이자 고소득층 아닌가. 귀족원은 곧 자신들에게 있는 거부권 버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정치적 타협이 있었으면 완만하게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총리 H. H. 애스퀴스는 자신의 모토를 Wait and see로 삼던 사람이기에 더욱.
허나 당대 자유당에는 문제아들이 있었다. 앞서 말한 로이드 조지가 대표적이고, 그 뒤를 잇는 것은...
윈스턴 처칠.
불 같은 성품과 빼어난 언변으로 무장한 이 두 소장 정치가들은 귀족들을 '이기적이고 응석받이인 기생충' '실업자들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평범한 500명'(로이드 조지), '어항 속 금붕어'(윈스턴 처칠) 이라고 부르며 자극하였으며, 이는 분노한 귀족들이 끝내 거부권을 행사하여 헌정 위기를 정말로 촉발시키기 위함이었다.
에드워드 7세는 웨일스 혈통의 촌놈 로이드 조지와 친구 아들놈 처칠에 대해 매우 불쾌감을 느꼈다. 그래도 로이드 조지는 자신의 불륜녀인 케펠 부인이 호의적이었기에 조금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지만, 처칠에 대해서는 계급의 배신자, 미국 냄새 나는 선동꾼 정도로 악평을 퍼부었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왕은 일이 진짜 위기로 번지기 전에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로이드 조지의 예산안 자체에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산안이 격추되는 것, 곧 헌정 위기가 실지로 폭발하는 것에는 더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랬기에 밸푸어, 랜즈다운 같은 보수당 인사들을 초청하여 여야 타협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으며 H.H. 애스퀴스에게 직접 로이드 조지-처칠 패거리의 입을 단속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자유당 강경파와 아일랜드 의회당은 귀족원이 전장으로 나오길 원했고, 보수당과 귀족원을 장악한 영국 보수 엘리트들은 이 대결을 피하기엔 너무 자존심이 강했다. 결국 귀족원은 인민예산을 부결했으며, 에드워드 7세는 그 날을 자기 생애 가장 비참한 날 중 하나라고 불평했다.
이후엔 '비선출 인사들로 구성된 귀족원에 이런 강력한 거부권을 휘두를 권리가 존재하는가?' '귀족 창설 권한은 국왕의 고유 권한인가, 내각의 조언 또는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이 영국 사회에 떠올랐으며, 귀족원-상류사회는 물론 왕실까지 정치판 한가운데 끌려나오는 추한 진흙탕 싸움이 전개되었다.
자유당-아일랜드 연대와 보수당-연합주의 연대간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었고, Wait and see가 모토인 애스퀴스 총리는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외려 자신의 정부를 존속시키기 위해 아일랜드 의회당, 자유당 강경파와 손을 잡고 귀족원의 거부권을 끝장내는 길을 택했으며, 왕이 '정말 구역질 난다' 고 회고할 정도의 무지무지한 정치적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국왕의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건강은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렸다. 헌정 위기에서 오는 정치적 피로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론 유럽 제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영국 국내 각 당파 사이에서 타고난 사교력으로 중재를 해오던 자신의 업적들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보며 차오르는 좌절감 탓도 있었으리라.
더해, 국왕은 당대의 유명 영매 제임슨 부인으로부터 특별한 전언을 들었다. 30년 전 죽은 동생 앨리스 공주 - 어릴 적 담배를 같이 피우며 비행을 저지르곤 했던, 그가 가장 아끼던 여동생이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준비하세요.' 라는 불길한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앞에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고, 1909년 섣달 그믐날엔 다음 해에 '아주 나쁜 운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불길한 징조, 신체적/정신적 퇴조. 이런 것들이 겹쳐, 1910년 4월 말 경이면 국왕을 관찰한 사람들이 '지치고 수척하다' '약간의 컨디션 난조' '말수가 적다' 라는 평가를 내리기 시작한다.
다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사람들은 - 국왕 본인은, 죽음이 정말 코 앞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발작적 기침이든 고열이든 원래 종종 찾아오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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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왜맨날상편만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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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재밌어요 ㄹㅇㄹㅇ
19세기-20세기 초반 역사는 보면볼수록 스펙타클 - dc App
백붕이는 갤러리에서 권장하는 비회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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