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26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 조롱 논란을 빚은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이벤트 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직접 발표할 예정이다. 사진은 25일 서울 시내의 스타벅스 매장의 모습. /뉴스1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26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 조롱 논란을 빚은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이벤트 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직접 발표할 예정이다. 사진은 25일 서울 시내의 스타벅스 매장의 모습. /뉴스1

직장인 현모(26)씨는 작년 겨울 사귀던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을 결심했지만 얼마 전 파혼하겠다고 남자에게 통보했다. 결혼 준비 기간에 벌어지는 감정싸움이나 뒤늦게 알게 된 성격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현씨가 4년 사귄 남자 친구와 결별을 생각하게 된 발단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이었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찬반 의견으로 갈린 두 사람은 크게 다퉜다고 한다. 얼마 뒤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하고 화해했지만 현씨 가족이 반대해 파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현씨는 “가족이 ‘정치 성향이 다르면 같이 살기 어렵다’며 발 벗고 결혼을 말렸다”고 했다.

정치적 견해 등 이념 차이로 인한 적대감과 분노가 결혼 같은 사적인 영역에서도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과 조선일보의 ‘한국 사회의 불평등 및 갈등’ 조사 결과, ‘자녀나 가까운 지인이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 하면 반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5%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응답자는 25%였다. 강원택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은 “공동체 구성원 간 이념 차이가 공적 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에서도 적대적 분노 감정으로 번져 사회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그래픽=김현국

◇분노 부추기는 정치권에 신물… 국민 51% “날 대표하는 정당 없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과 조선일보는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27~30일 나흘간 전국 남녀 304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서 이념 차이가 결혼 등 사적 영역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념 차이가 적대적 분노로 이어져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3명 “견해 다르면 식사 안 해”

이번 조사에선 20대 여성과 고소득층에서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자녀나 가까운 지인이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 하면 반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반대한다’고 답한 20대 여성(47%)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 20대 여성(22%)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월평균 가구 소득을 기준으로 할 때, 2000만원 이상인 사람 중에서 ‘반대한다’고 답한 비율(50%)이 가장 높았다.

이념 차이는 일상 소통에도 장애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과 식사 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꺼려지는가’라는 물음에 응답자의 31%가 ‘그렇다’고 답한 것이다. ‘정치 문제에 관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는 응답(36%)이 ‘그렇다’는 응답(24%)보다 많았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통해 의견 차이를 좁히려 하기보다 교류를 끊으려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빼곡히 꽂혀 있는 투표 안내문  경기 수원시 영통구의 한 아파트 단지 우편함에 6·3 지방선거 투표 안내문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과 한국리서치가 지난달 27~30일 전국의 성인 남녀 3043명을 조사한 결과, 51%는 “나를 대표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했다. /뉴시스
빼곡히 꽂혀 있는 투표 안내문 경기 수원시 영통구의 한 아파트 단지 우편함에 6·3 지방선거 투표 안내문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과 한국리서치가 지난달 27~30일 전국의 성인 남녀 3043명을 조사한 결과, 51%는 “나를 대표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했다. /뉴시스

◇정당 불신이 이념 갈등 키워

스타벅스코리아의 ‘탱크데이’ 이벤트와 관련해 불거진 ‘역사 폄훼’ 논란에도 이념 차이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성 정치권이 대중들의 정치적 이념 차이 등을 수렴하지 못해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정치권이 이념 대립과 상대에 대한 분노를 지지 세력 결집을 위한 ‘땔감’으로 활용하면서 대중의 정치 불신을 키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조사에서 ‘나를 대표하는 정당이 없다’고 한 응답자는 51%였다. ‘나를 대표하는 정당이 있다’는 응답(17%)의 3배 수준이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45%로, ‘필요하지 않다’(22%)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보수층(54%)이 진보층(40%)이나 중도층(43%)보다 많았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의 안지민 연구원은 “기성 정당이 대중의 이해관계와 정체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을 악(惡)으로 규정하려는 모습도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강한 리더 결정에 의지

이번 조사에서 ‘강력한 리더가 의회보다 더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물음에 응답자의 46%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1%였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민주적 절차보다 강한 지도자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라는 물음에는 응답자의 38%가 ‘동의한다’고 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1%였다. ‘선거에서 승리한 지도자는 반대파의 의견에 구애받지 않고 국민의 뜻을 강력하게 밀어붙여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38%가 ‘동의한다’고 했고, 29%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성균관대 좋은민주주의연구센터 김수인 전임연구원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권위주의적 리더에 대한 선호로 전이되고 있다”며 “이념 대립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적 가치보다 ‘강한 리더’ 한 명의 결단에 의존하는 문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국가 주요 결정 밀실에서 이뤄져”

전문가들은 이념 대립과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이 음모론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의 49%는 “국가의 주요 결정은 공개되지 않은 배후 집단에 의해 이뤄진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고,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20%였다. ‘공식적인 설명보다 숨겨진 의도가 있을 가능성을 더 신뢰하느냐’는 질문에는 32%가 ‘그렇다’, 30%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가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면서도 각자의 정치적 견해를 강고하게 만들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경남 창원에 사는 박모(68)씨는 최근 세 언니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4자매 중 막내인 박씨는 여당을, 언니들은 야당을 지지하는데 서로 유튜브에서 접한 정치 관련 주장을 근거로 설전을 벌이다 관계가 멀어졌다고 한다. 박씨는 “서로 상대 주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 대화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했다.

이번 조사에서 ‘정치 관련 콘텐츠를 보다가 격한 공감이나 분노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41%가 ‘그렇다’, 23%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인터넷 정보 중 무엇이 사실이고 의견인지 구분하기 어렵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43%가 ‘그렇다’, 24%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치인이나 정치 유튜버는 소셜미디어에서 콘텐츠 조회 수를 높이려 여러 사회 이슈를 극단적으로 풀어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며 “이런 정보를 계속 접하다 보면 편향된 정치 성향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조선일보 공동 기획

※ 도움 주신 분들

서울대학교 강원택 국가미래전략원장(정치외교학부 교수)·이재열 사회학과 교수·김병연 경제학부 교수·김경민 도시계획학과 교수, 정연경·안지민 국가미래전략원 연구원, 김수인 성균관대 좋은민주주의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이보미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