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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열암 박종홍, "철학은 해서 무엇하나?"

ㅇㅇ(118.217) 2026.04.17 04:10:55
조회 467 추천 12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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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나는 어떤 책사(冊肆)에서 몇 권의 서적을 구하다가, 주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 일이 있다.


주인 「선생은 철학을 전공하시나요」


나 「그저 좀 공부해본다고 하고 있습니다」


주인 「그럼 선생도 지낼만 하신게로군」


나 「그것은 또 웬 말씀인가요」


주인 「그래도 철학을 하는 분들은 모두 의식(衣食) 걱정은 없는 것 같던데요」


나는 잠시 어리둥절하여 말할 바를 몰랐다. 우선 나 자신이 그러한 처지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여오는 사람의 하나요, 또 내가 아는 범위의 철학하는 친구치고 그에 해당할 만한 분이 매우 드물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세상에서는 흔히 철학이라는 학문을, 팔자 좋은 사람들이 할 걱정이 없으니까 「삼라만상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영원 불멸의 진리란 무엇인가」 하고 그리 신통해 보이지도 않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아닐까. 더구나 현실적 활동력에 있어서 무능한 사람들의 피난처 모양으로 보는 것이나 아닐까.


「사람이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人無遠慮, 心有近憂)고 공자는 말하였거니와,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초미의 급한 근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우원(迂遠)한 걱정거리에 몰두하는 것을 다름아닌 철학이라고 상상하는 상싶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철학에만 한한 일이 아니오, 모든 학구적 태도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안타까이 공부하고 싶은 일념에 불타고 있는 유위(有爲)의 청년들로서 당장의 호구지책에 얽매여 고민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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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희랍(希臘)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소위 순수한 학문 즉 「학문을 위한 학문」은 생활필수품과 더불어 편의와 향락을 위하여서의 거의 전부의 사물이 갖추인 연후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옛날 애급(埃及)에 있어서 수학적 과학이 먼저 형성된 것은 승려계급이 일찌기 유한상태(有閑狀態)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희랍에 있어서 서양의 모든 학문이 발단된 것도 마치 그네들이 순수한 「학문을 위한 학문」을 인간 생활의 최고 가능성으로 알고 신에 가까운 관상적(觀想的) 태도의 정복(淨福)을 칭송하였으며, 또 그럴 수 있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근대의 헤겔에 이르러서는 철학의 궁극적인 경지를 논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대한 이념을 인용하여 가며, 결국 「자기에 도달하고 또 자기 속에만 존재하는 사유의 정적(靜寂)한 장소에 있어서는 제(諸) 민족과 제(諸) 개인의 생을 움직이는바 모든 관심은 침묵한다」[논리학 제2판 서언(序言)]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철학이 만일 여기에 그치고 만다면 그야말로 현실적인 세계의 몰락의 첫 단계인 황혼 속에서 날개를 치는 철학이 될 것이오, 생의 노쇠한 자태에 소생(甦生)의 신선한 활력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노쇠함을 정관(靜觀)하는 철학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서 철학은 인류 사회를 끌어 올려 구1원해 내는 철학이 못되고 자기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스스로 고독한 영혼 속에 안주의 땅을 찾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하여 그네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현실계는 그네들이 무시하여야 할 세계로 화(化)하고 만다. 이러한 철학에서 우리가 지도적(指導的) 실력을 발견하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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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나는 6·25 이후 어떤 학생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을 여기서 상기 아니할 수가 없다. 즉 그 학생의 말에 의하면 이처럼 국가의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를 당하여 철학이 다 무엇이냐. 그런 것은 추후 태평시대에 천천히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니 우선 국가, 정치에 관한 것을 공부하여야 된다는 것이었다.


청년다운 솔직한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닥쳐드는 것은 모두가 국가, 정치에 관한 문제인 상싶다. 신문의 기사를 보라, 가두(街頭)의 주요 화제는 무엇인가. 정치학이나, 법률학을 전공하려는 학도의 수효가 최근에 와서 격증(激增)하고 있다는 것은 한갓 출세욕에 들뜬 일시적 유행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할 현상이 아닌 줄 안다.


민주국가의 새로운 건설에 즈음하여 이러한 방면의 관심, 계몽, 교양은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생각된다. 초미의 현실적 문제가 해결을 강박하고 있는데, 해가(奚暇)에 철학적인 사색이나 하고 들어앉아 있단 말인가. 대체 철학이란 말만 들어도 따분하고 난삽한 것이라는 선입견이 머리에 떠올라 현대 청년들의 비위에 맞지 않을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결국 철학이란, 이 세상에서 생활고를 모르는 팔자 좋은 사람, 그나마 비활동적인 소극적 위인(爲人)이 국태민안의 평화시절에나 해서 무방함직한 학문인 것도 같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피상적 관찰이 아닐 수 없는 것이오, 진정한 의미의 철학이 과연 그러한 것 이외의 것일 수 없는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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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나는 신학년도 입학시험기를 당할 때마다, 여러 명의 철학전공 희망의 상이군인을 구술 시문(試問) 석상에서 대면하게 되거니와, 그들의 전공과목에 대한 열의는 고등학교를 새로 마친 일반 학생에 비하여 오히려 확호(確乎)한 것이 사실이다. 불여의(不如意)한 건강, 넉넉지못한 학비, 모든 악조건과 싸우면서도 철학이 하고 싶다는 것이다.


더구나 폭연탄우(爆煙彈雨), 일선에 있어서의 처절한 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인생의 문제를 생각 아니할 수 없게 한 것인 만큼, 철학이라도 좀 해볼까 하는 온미(溫微)한 태도라기보다도, 철학을 아니 하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충심(衷心)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간절한 요구라고 하겠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은 팔자가 좋아 아무 근심 걱정도 없고, 또 태평시대에 태어났으니까 철학을 하려는 게지요」라고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아직도 생사의 관두(關頭)에서 신랄한 경험을 아니하고라도 살아갈 수 있을 만치 다복하였기 때문에 철학을 자기와 인연이 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요」하고 반박을 당할른지 모른다. 근심 걱정이 없기 때문에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고난에 찬 인간이기 때문에 철학이 요구되는 것이오, 무사태평한 시절이니까 철학이나 해볼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다사다난한 비상시니까 철학을 아니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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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여부조차 알 길이 없이 격조하였던 친구의 한 사람을 나는 환도 후 비로소 서울서 만나, 그동안 겪어온 풍상이, 그로 하여금 백발에 가까운 노옹(老翁)의 티를 내게 하였고, 더욱 그의 생각조차 옛날과는 달라지게 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철학 전공자도 아닌 그는 자못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잠시 그 무슨 추억을 더듬는 상싶더니 끝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6·25 이후 우리는 모두가 철학자가 되었지요」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서도 몇 번이나 이 말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였고, 그 후에도 두고 두고 잊혀지지가 않는다.


철학은 과연 빵 굽는 법 하나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부질없이 까다로운 공론(空論)을 얽어보려는 것만이 철학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현실적 생활 자체의 내부로부터 무가내하(無可奈何)로 솟아나는 근본적 요구에 기인하는 것이요, 계획적으로 꼭 무엇을 위하여 한다기보다도 그에 앞서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에 의하여 아니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설혹 철학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치더라도 그것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일정한 태도 즉 철학은 필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표명하는 것, 역설적이긴 하나, 이를테면 또 하나의 철학적 태도,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인생관임이 틀림없다. 어떤 특정된 철학을 부인하려는 것이오, 그 자신 벌써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철학하는 것의 특색이 있다. 그러므로 구태여 말한다면 철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철학개론강의』(1953)






※ 세줄요약


1. 철학을 현실과 유리된 학문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을 하는 거다


2. 6·25 같은 상황에서 철학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들 생각하지만, 반대로 그런 상황이라서 철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3. 철학이 필요없다는 주장 자체가 사실은 그것과 관련된 가치관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일종의 가불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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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난 조금 생각이 다른데...
    철학은 사회와 삶, 개인의 인생과 너무 동 떨어져 있어..
    배울수록 현실에 대한 직관이 떨어지고 사회와 고립됨.
    그리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적 가치관은 엄밀히 따지면 철학적 가치관이라기보단 해당 분야의 수단적 가치관이라고 보는 게 맞음.

    04.17 06:46:14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비판적 사고 같은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능력도 용어의 계보를 따라서 철학이라고 부르면 할 말 없지만....
      사실상 현시대가 말하는 철학은 개인이 살아가는데 쓸모가 있기보단
      너무 기능적인 면에서 멀어진 느낌이야...

      04.17 06:53:04
    • ㅇㅇ(118.217)

      @ㅇㅇ 물론 그런 면도 있음
      저자도 그래서 2짤 밑의 설명을 먼저 깔아놓고 얘기하는 거라고 보면 됨

      04.17 09:55:20
    • ㅇㅇ(211.235)

      눈을 떴구나 스피노자를 접해라

      04.17 12:06:11
  • 무르망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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